몇년 전, 첼시 감독으로 부임한 AVB가 인터뷰하면서 말한 대목이 있다.
Q: 극단적으로 밑으로 내려온 전술(Ultra-low Block)을 쓰는 팀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상대 선수를 자극해서 끌어내야 한다. 볼을 직접 빼앗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해서,
볼을 당근으로 사용하면서 유인해야 한다."
말하자면, 손자병법의 성동격서. 한쪽에서 위협을 가해 상대방을 유인한 다음, 비어있는 다른쪽을 공격하는 것.
근데 요즘 EPL을 보면 강팀, 약팀 가릴 것 없이 진영을 내려서 상대방한테 일부러 주도권을 내주는 경기가 많이 보인다.
아무리 상대 선수들을 끌어내려고 진영 바깥에서 패스를 몇번을 해도 상대 선수들은 요지부동.
오히려 볼을 돌리다 뺐기면 위험한건 점유하는 팀 쪽이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게 상대의 의도니까.
이미 점유율 축구에 대한 대응책은 어느정도 생겼고, 선수들은 그 "당근"에 잘 유혹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당근"이 여전히 유효할 때는 어느 때인가.
나는 그 대답을 우리가 평소 말하는 "크랙"에서 찾고 싶다.
왠만한 도발이나 유인에는 안걸리는 선수들이 '아 저놈은 빨리 볼을 안뺐으면 큰일나겠다'하게 만드는 선수.
경기를 주도하고 분위기를 뒤엎는 정도의 선수는 그 위협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존재마저도 상대방한테 부담을 지운다.
성(聲)을 내는 존재한테서 정말로 위협이 느껴져야 다른쪽에서 격(擊)을 할 틈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런 선수가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AVB가 말하는 "당근"이 유효하게 먹힐 수 있게 되어가는 요즘 축구경기양상이다.
감독들이 공격수가 필요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자기네 탑 스코어러를 지키려고 하는 것도,
<싸커노믹스>에서 공격수의 가치는 항상 과대포장되어있다는 주장도 이런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요즘 축구에선 여느때보다도 "크랙"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강팀들과의 경기운영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이 어느정도 성립되었기에.
P.S.: 라멜라는 베일이 아니다. 아마 윌리안이 왔더라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덧글
근데 크랙도 그 정도라는게 있어요...
다른 예이지만 1988년 유럽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2:0으로 앞선 네덜란드가 9명이 수비하는 극단적인 전술로 일관할 때 소련의 알레이니코프가 진짜 미친듯한 드리블을 선보였던 적이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파고들어서 볼을 뺏기지는 않았는데...슛을 못해서...진짜 한쪽으로 페널티 에리어로 들어갔다가 반대쪽으로 나오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 크랙 한명이 중요한게 아니라 점점 두명 이상으로 파괴적인 공간을 더 키워야 하는 부분들이 강조되게 되었죠.
(결국 그 경기에서는 막판 페널티킥 한번밖에 못만들어 냈는데...문제는 그 페널티킥도 네덜란드 골키퍼가 일부러 만들어 낸 거였다는 소련 입장에선 미칠만한...)
점차 굳혀지는 수비를 깨는 방법으로 로바노프스키 감독은 '부분적 우위'를 점해야 하는 부분을 강조했는데 여기서도 중요한 점은 '키핑력 좋은 선수' 가 '빨리 움직여주는'선수에게 넣어주는 타이밍, 그리고 그 뒤의 움직임으로 또다시 '부분적 우위'를 점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로바노프스키의 이론은 지금도 통용되는 일종의 '도상학'에서의 핵심이긴 한데...
이러다보니 이야기 하신 크랙 한명만으로 될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 바르셀로나가 미친듯한 크랙 2-3명을 동시에 쓸 수 밖에 없고 그러고도 모잘라서 지금도 전 세계를 해매는거죠...사실 돈 있는 팀이라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수비라는 것의 기본 개념이나 발달이 장난 아니에요.
공격에 나선다는 것은 정말 위험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행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앞으로 축구에서는 상대방이 수비적으로 정돈되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낼 선수들이 중용될 것 같습니다. 진영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크랙이거나, 아니면 빌드업 중간에 볼을 뺐어서 역습상황을 만들 수 있는 '태클러'거나 말입니다.
관중석이 아닌 필드에 저는 내려갈 수 있는지라 필드에서 같이 관전하는데 아시아노트님이 제주가 밀릴 때...정확히는 상대 선수가 페널티 에리어로 진입했을 때마다 '아이고! 저거!저거!' 하시면서 안타까와 하시는데 전 태연하게...
"아네요 위기상황 아닙니다"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궁금하게 여기시길래, '수비진형' 관련을 약간 설명드렸어요.
수비수들이 너무 떨어져 있지 않는 한 팀마다 삼각형 또는 사각형을 유지하는 모습들이 보일텐데, 그 라인이나 모습이 무너지지 않는 한 공격수는 웬만해선 슈팅이 안되고, 슈팅을 하더라도 골키퍼 정면이나 빗나가는 각도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조금만 지체를 해도 막히거나 뺏긴다고 말이죠.
그래서 그걸 깨려면 달리면서 감아차던지 하는 곡선구를 맘대로 구사하거나 그 타이밍을 잘 잡는 정도의 엄청난 테크닉과 그 순간을 잡아내는 공격수들이 요구되는데...그러려면 드리블링 능력이 출중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그 뒤에는 패스를 해줄수 있는 선수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수비도 이거 그냥 냅두지는 않기 때문에 결국은 도전과 응전이 계속되는거고...그 주의력을 깨기 위해선 이건 양팀 다 엄청난 소모의 체력전으로 가게 되는 것이 현대축구라고 말이죠.
관중석에서 보는 관점, 특히 경기를 경기장 꼭대기에서 내려보는 '컴퓨터 오락 게임'의 관점에서는 그런 부분을 보고 싶어도 못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답은 늘 그렇지만 책이나 PC시뮬레이션이 아닌 현장에 있어요.
이야기하신대로 '수비적으로 정된되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 내는' 선수들이 중용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골 기회를 만들기조차 어려워지는게 현재 '강팀'들이 기본적으로 해 내는 것들이다보니까요.
울산의 '철퇴축구'도 그걸 한국적으로 잘 소화해 낸 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실제로 울산의 경기를 보면 등골에 땀이 서늘하게 흘러요. 이전에 김정남 시절의 '수비축구' 시절에도 울산에서 공 뺐었다 하면 가공할 역습은 각오해야 했습니다.
제일 상대 진영의 공간이 비게 되는 상황은 아무래도 역습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서로가 안만들려고 하는데다. 무엇이 되었건 '공격'을 하려면 '공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 & '공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 는 것 + 공 가진 팀만 골을 넣을 수 있고 + 축구는 골 많이 넣은 팀이 이기는 것.
이라는 몇가지 대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 역습만 가지고 경기 전체를 꾸밀수 없는 '축구의 대전제'를 무시할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결론은 원론적이지만 '위기상황을 짧게 가져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냐'이고 그건 세대별로 여러 답이 나왔죠. 문제는 이게 다 틀린 답이 아니라 맞는 답이라는 겁니다.
수비쪽의 심적 압박과 공격쪽의 심적 압박뿐 아니라 그런 부분을 이겨내고 버티기 위한 '체력' 이라는 부분까지 같이 있게 됩니다. 체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어떤 훌륭한 공격옵션을 가지고 있어도 실행 도중에 틀어지거든요.
효율성만 본다면 역습만한 것은 없습니다만 서로간에 그런 기회는 잘 주려 하지 않고 잘 나오지도 않죠. 그렇기 때문에 언급하신 '크랙에 의한 공격의존도'는 점점 높아지는 것이 현재 추세입니다. 이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선 결국 다른 효율적인 방향이 나와야 하는데 '역습'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은 이미 나올게 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지경입니다. 역습 위주라고 하면 상대도 준비 다 해놓고 있죠. 그러다보면 결론은 '역습을 하려고 해도 크랙인 선수는 필요' 하다는 '크랙 필요'라는 논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크랙인 선수가 공을 잡았을 때에도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이면 다시 막히는 그런 부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결국 '크랙'과 '크랙을 도와주는 또다른 크랙들' 은 역습-지공 둘 다 필요한 필요조건이 되었고 그 이유는 '숫적 우위에 따른 공간 확보를 위한 필수요소'라는 이야기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역습의 경우는 '효과적'이라고는 하지만 서로가 아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양쪽의 팽팽한 입장에서 어디가 먼저 줄이 '자의건 타의건'간에 먼저 끊어지느냐가 승부가 됩니다. 때문에 심적인 것 뿐 아닌 체력도 같이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집중력 유지와 심리적 압박을 버티기 위해선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냥 떨어져나갑니다.
때문에 몇몇 감독들이 "이전에는 [잘하는 선수]로만 뽑아야 했지만 지금은 멘탈이 강한 선수, 어떤 부분을 잘하는 선수 등 '종합적인 것'을 따지게 되었다"라고 한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기도 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네요.
최근 뉴캐슬이 강팀들 상대로 경기하는거 보고 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상황에 따라선 오히려 공격하는 쪽이 더 불안해할 수 있겠구나 하네요.